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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2-27 10:11
[25호] Art-Collector③: 무명의 예술을 위한 실험적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글쓴이 : KARTS
조회 : 202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 아래 페기 구겐하임. 출처: Pinterest>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을 떠올리면 그의 전설적인 타이틀에 압도되곤 한다. 희대의 명작을 하루 한 점씩 사들이던 슈퍼 컬렉터, 엄청난 재산의 상속녀, 잭슨 폴록(Pollock)과 이브 탕귀(Yves Tanguy) 등을 무명부터 발굴해낸 선구적인 감식가, 세계대전 중 유럽 예술가들을 미국으로 이주시키도록 지원한 미술가들의 대모, 무수한 예술가의 연인 등 여러 이야깃거리가 페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페기 구겐하임의 생애

페기는 1898년 8월 26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미국 미술이 아직 자체적인 계보를 갖지 못한 시기였다. 페기는 어릴 적부터 유럽을 돌아다니며 미술을 접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을 “부자 집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소개했다. 페기의 외가는 은행을 운영했고, 친가는 광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부유한 가정환경 덕분에 페기는 어릴 적부터 개인 교사에게 미술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1912년 아버지가 타이타닉 호 침몰로 사망하면서 20대 초에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됐다. 아버지의 죽음 후에도 페기는 개인 교사를 두고 공부를 계속했다. 이 시기 페기를 가르치던 루실 콘(Lucile Kohn)은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을 지원하던 급진주의자로 페기의 사상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페기는 뉴욕 44번가에 위치한 ‘선와이즈 턴(Sunwise Turn)’ 서점에서 일하게 된다. 당시 구겐하임 가(家)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했을 때 푼돈을 받으며 점원 일을 하는 것은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선와이즈 턴’은 전위적인 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했고 미술품 판매도 겸했다. 페기는 서점에서 여러 예술가를 만나면서 현대 예술과 더욱 밀접해졌다. 이후 파리로 향한 페기는 서점에서 마주쳤던 작가 로렌스 바일(Raurence Vail)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보헤미안의 왕’이라 불리던 바일은 파리에 사는 미국 소설가들과 절친하여 페기도 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페기에게 예술적 영감이 되었던 바일과의 사랑은 그러나 두 사람의 외도로 파경을 맞았다. 그 후로 페기는 수많은 예술가와 관계를 맺었다. 예술가들과의 사랑은 페기에게 영감(靈感)이 되어주었다. 페기가 사귀었던 유명한 예술가들은 <고도를 기다리며>로 유명한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이브 탕귀, 초현실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등이 있다.  

<페기 구겐하임과 배우자였던 막스 에른스트. 출처: huffingtonpost.com>


구겐하임 존느: 유럽에서의 첫 번째 갤러리

페기가 본격적으로 미술 사업을 시작한 것은 40대에 들어서다. 그는 1938년 런던에 ‘구겐하임 존느(Guggenheim Jeune·젊은 구겐하임)’라는 갤러리를 열었다. 페기는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갤러리를 운영하기 위해 평소 알고 지내던 예술가들로부터 조언을 들었다. 특히 페기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에게 현대 미술의 초현실주의와 모더니즘 미술의 갖가지 형태를 배웠다. 뒤샹은 페기의 화랑에서 추상주의과 초현실주의 미술품을 전문적으로 다룰 것을 권했다.‘구겐하임 존느’의 개관전이던 <장 콕토(Jean Cocteau)> 전도 뒤샹의 제안이었다. 개관전은 크게 성공하여 ‘구겐하임 존느’는 런던에서 단숨에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어서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이브 탕귀>, <헨리 무어(Henry Moore)>,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등의 전시를 치르며 이곳은 실험적이며 국제적인 갤러리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구겐하임 존느’의 명성과 별개로 재정이 어려워져 결국 갤러리 개관 1년 6개월 만에 문을 닫게 된다. 페기는 다시 새로운 갤러리를 건립하려 했으나 곧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사업을 시작할 수 없었다. 대신 페기는 작품 수집에 전념했다. 매일 작가 작업실을 돌며 하루 한 점 이상의 작품을 구매했다. 전쟁 중 목숨을 담보한 일이었다. 페기가 구매한 작품은 점점 쌓여갔고, 보관할 곳이 모자란 데 이르렀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그가 가진 작품들이 보관할 가치가 없다며 비밀 수장고를 열어주지 않았다. 당시 루브르나 테이트 같은 미술관은 페기의 소장품을 ‘예술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페기는 할 수 없이 페기는 미술품들을 친구 소유 헛간, 지방 미술관 등에 옮겨가며 보관했다. 그러다 마침내 나치가 프랑스 남부로 진군할 것이라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페기는 뉴욕행을 결심했다. 그는 뉴욕으로 가는 배에 자신의 컬렉션을 극적으로 실을 수 있었다. 미국에 들어온 페기는 아직 유럽을 탈출하지 못한 작가들을 위해 자금을 후원했다.


금세기 미술: 미국에서 두 번째 갤러리

<‘금세기 미술’화랑 전경. 출처: huffingtonpost.com>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페기는 뉴욕에서 다시 화랑을 열기로 계획했다. 그리하여 1942년 ‘금세기 미술(Art Of This Century)’화랑이 문을 연다. 파격적인 구조의 화랑이자, 뉴욕 57번가의 유일한 상업적 화랑이기도 했다. 개관 첫날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렸다. 페기는 이날 수익을 모두 적십자사에 기부했다. 페기는 자신의 화랑을 두고 “과거를 기록하는 대신 미래를 제공하는 데 있어 성공을 담보한다”고 말했다. 이곳은 곧 망명 미술가들의 중심지이자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이 성장하는 요람이 되었다. 이러한 ‘금세기 미술’은 5년간 운영되면서 많은 비평가 사이 담론을 낳고, 수많은 신인 미술가들의 발굴을 해냈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화랑 공모전의 심사위원이던 뒤샹은 폴록의 작품을 보고 심사를 주저했다. 페기는 뒤샹이나 다른 이의 눈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결정을 믿었다. 페기는 폴록을 “언젠가 (호안) 미로처럼 될 유망한 작가”라고 평했다. 당시 폴록은 미술관에서 잡부로 일하고 있었다. 페기는 폴록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스튜디오를 마련해주고 매달 생활비를 지원했다. 폴록은 첫 개인전부터 네 번째까지 모두 ‘금세기 미술’에서 열었다. 페기는 인생을 통틀어 폴록을 발견한 점이 가장 큰 성취라고 회고했다. 이외에 새로운 예술가 발굴에도 힘쓴 페기는 <여성 작가 31인 기획전>을 열었다. 여성 예술가로만 이뤄진 최초 전시회였다. 그 유명한 프리다 칼로(Frida Kahlo)가 이 전시로 미국 진출 발판을 마련했다. 

<페기 구겐하임과 잭슨 폴록. 출처: artsy>


‘금세기 미술’이 미국 미술계의 중심에 서 있었음에도 페기는 유럽에서 생활을 그리워했다. 화랑 운영에 지쳐가던 페기는 무명의 화가들을 도울 수 있도록 수집품 몇 가지를 뉴욕에 놓아두고 1947년 다시 유럽으로 떠났다. 미술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유럽으로 돌아가는 페기를 두고 “현대 미술의 심각한 손실이다…뉴욕의 화랑주인으로서 그녀는 이 나라의 진지한 젊은 미술가들에게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주었다…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가 후원한 미술가들이 알려지고 성장해갈수록 미국 미술사에 있어 페기 구겐하임의 위치는 더욱 커질 것으로 믿는다”고 썼다. 페기는 베니스에 저택을 구입해 수집품들을 전시하다가 1969년 그의 삼촌이 운영하던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했다. 일부 남은 소장품과 저택은 베니스에 그대로 유지되어 현재까지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발전재단 웹진 기자단

미술원 미술이론과 서혜원



<참고>

● 임정미,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에 관한 硏究 : 전후 미국미술 형성에 있어서 후원가, 수집가로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00 

● 「미술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우리에겐 우리가 가진 위대한 보물을 대중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신동아』 2010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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